건축학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정잉쯔 2019. 9. 10. 15:38

 

영묘 건설
영묘 건설의 아이디어는 마우솔로스가 생전에 할리카르나소스를 지으며 같이 생각해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죽은 이후에는
아르테미시아가 무덤 건설을 총감독하였는데, 아르테미시아는 무덤 건설비용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예술가를 데려오기 위해 그리스에 사자를 보냈고, 이렇게 2명의 유명한 건축가 자유에 너의 프티오스와 사티로스가 참여해
스며, 4명의 저명한 조각가 스코파스, 브리악시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가 축조에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스코파스는 다른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건축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였다.

무덤은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지어졌다.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건축가들은 그 속에서 작업했다. 작업장의 중앙에 무덤 본체
가 되는 석축이 놓여 있었고, 사자의 석조상을 옆에 배치한 계단이 석축을 향해 세워졌다. 그리고 이 외벽을 따라 신과 여신상이
놓여 있었으며, 모퉁이마다 말을 탄 전사의 조각상이 무덤을 지키는 형식으로 배치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모양의 무덤이
영묘의 3분의 1이나 되는 높이로 솟아있었다고 한다. 또한 장면을 묘사한 조각이 새겨졌다.
스코파스가 동쪽을, 브리악시스가 북쪽을, 티모테오스가 남쪽을, 레오카레스가 서쪽의 조각을 맡았다. 스코파스는 그리스인과 아마조네스(호전적인 여성 부족)의 투쟁을 그렸고, 다른 3명은 라피타이와 켄타우로스의 투쟁 등을 그렸다.

무덤의 상단에는 36개의 가느다란 석조 기둥들이 세워졌다. 한 면에 10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이 중 맨 끝 2개의 기둥은 서로 다른 면들이 공유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석조 조각상들이 1개씩 놓였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쪽에는 거대한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돌 벽돌이 쌓였다.
영묘의 지붕은 영묘 높이의 3분의 1이나 차지했고, 피라미드 형식으로 지어졌다. 지붕의 맨 위에는 거대한 콰드리가(4마리 마차) 조각상이 놓였다.
이 마차에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이 타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타고 있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근거로는 그리스 세계에서 주인 없는 마차는 주인의 죽음을 의미했던 것으로,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이 마차 조각상 근처에서 발견되었지만, 그들의 상이 마차를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들의 상은 아마도 2층 또는 1층에 다른 조각상처럼 놓여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할리카르나소스
마우솔로스는 웅장하고 난공불락의 수도를 새로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새로운 수도로 '할리카르나소스'를 낙점했고,
막대한 양의 세금을 이 도시를 새로 꾸미기 위해 쏟아부었다. 그는 이 도시에 대리석으로 조각상, 궁전, 신전들을 세웠다.
그는 할리카르나소스 앞바다를 깊게 파고, 방어를 위해 성벽과 망대를 만들었다. 또한,
그 안쪽에 숨겨진 작은 항구도 건설하였다. 도시 내부에는 시민들을 위한 광장, 도로, 주거시설들을 정비하여 4개의 문과
2개의 대로를 지었다. 도시에는 그리스풍의 극장과 전쟁의 신 아레스를 모신 신전도 지어졌고, 마우솔로스의 거대한 요새형
궁전이 만의 한 구역에 지어졌다. 이 궁전은 도시 전체를 철저히 감시하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우솔로스가 기원전 353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누이 아르테미시아가 홀로 왕국을 경영하게 되었다. 마우솔로스는 죽기 전부터
그를 위한 장대한 무덤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너무나 거대하여, 그의 자식 세대까지 이어져 완성되었는데, 이 무덤에 대한
명성과 소문이 워낙 자자하여, 심지어 지금까지도 '마우솔레움'은 무덤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 정도이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리움 북쪽에서 발견된 마우솔로스로 추정되는 거상
슬픔에 빠져 포도주를 마시는 아르테미시아 (1775년 작)
무덤 건설을 시작한 직후,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를 알게 된다. 마우솔로스의 죽음을 알게 된 지중해의 정복지
로도스 섬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할리카르나소스를 공략하기 위해 해군을 보내온 것이었다. 이것을 알아차린 아르테미시아는 큰 항구
안쪽에 있던 비밀 항구에 자신의 배를 숨겼다. 그리고 로도스 군이 상륙을 시작하자 아르테미시아가 이끄는 해군은 로도스 해군의
측면을 기습하여 훌륭하게 물리쳤다. 그 후, 아르테미시아는 재치를 발휘하여 자신의 군대를 적선에 실어 로도스 섬을 공략하러 출전
했다. 로도스 섬 사람들은 자신들의 해군이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방어도 하지 못했고, 마을은 함락되고 반란은 진압
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마우솔로스가 죽고 난 후 2년 후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 마우솔로스의 유골을 포도주에 섞어 마시고,
슬픔에 잠긴 가운데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설로 인하여 아르테미시아는 헌신적인 아내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의 유해
는 화장되어, 아직 미완이었던 무덤 내부에 안치되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희생된 제물들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놓인 후,
이후 그 통로는 자갈과 흙으로 봉인되었다. 역사가 대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의뢰자가 죽은 이후에도 무덤의 조각가들은 계속
남아있기로 하였는데, 이는 이 무덤이 마우솔로스의 명성을 기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각가들 개개인의 자부심이자 명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복
기원전 4세기경, 이 지방에는 소아시아 서부의 '마리아' 지방을 통치하는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작은 왕국이 있었다.
당시 이 고대 왕국은 '헤카톰누스'라는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고, 헤카톰누스는 주위의 몇몇 도시와 구역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원전 377년, 헤카톰누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마우솔로스와 딸 아르테미시아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당시 마리아
에서는 통치자가 가문의 힘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자매와 결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마우솔로스는 공격적인 군사 정책으로 인해
그의 영토를 아나톨리아 지방의 남서부 해안까지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리키아' 지방의 영토를 정복하며 그곳의 문물들
을 견문하게 되는데, 이때 본 거대한 무덤들이 나중에 그의 영묘 건설에 영향을 주었다.

마우솔로스는 페르시아의 '사트라프'로 24년 동안 할리카르나소스와 그 주변 지역들을 통치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의 삶과 정치를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그리스풍의 도시들을 해안에 건설하였고, 그리스의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이 도시들에 도입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