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스 섬의 등대에 관한 정보
고고학적 발굴
1968년, 유네스코는 일련의 수중 고고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파견하였고, 이 조사로 인해 등대의 잔해가 세상에 처음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이 군사 지역으로 지정되고, 고고학자들의 인력 부족으로 이 발굴은 잠정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자이브 앙페레가 알렉산드리아 동쪽 항구의 바닷속에서 등대의 잔해를 발견하였고 1995년 공개하였다. [6] 확실한 사진을 얻기 위해 특수 제작된 카메라를 이용하였고 인해 수중에서 무너진 기둥과 벽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주요한 발견으로는 49~60톤에 달하는 석회암과 30개의 스핑크스, 5개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또한 통해 람세스 2세 당시의 유물을 다시 복원하기까지 하였다. 이 유물들은 현재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에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또 다른 고고학자가 반대편 항구를 수색하였고, 지진으로 인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신전과 주거지역의 잔해를 발견하였다. 현재 다이빙으로 이 잔해들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가능하며,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는 이 유적들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할 준비를 하고 있다.
건설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자 헬레니즘-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에 의해 건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여 자신을 소테르(구원자라는 뜻)로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항구 부근의 파로스 섬에 등대를 건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등대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대에 이르러 완공되었고, 약 800 탤런트의 은이 들어갔다고 한다. 등대의 빛은 등대 상부의 화로에 의해 만들어졌고, 등대 대부분은 백색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소스트라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본은 등대에 붙어있던 금속판에 소스트라투스의 이름이 있었다고 전했고, 대 플리니우스는 이 소스트라투스라는 사람이 등대의 건축가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학자 루치안은 소스트라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왕의 이름을 새겨넣은 판 아래에 새겨서, 후대에 그 판이 떨어진 후에도 자신의 이름은 계속 남아있도록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건축에 사용된 사암과 석회암은 도시 동쪽의 사막에 있던 채석장에서 채굴해 가져온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등대 하단의 주춧돌에는 왕의 이름을 새겨져 있지는 않았지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이 등대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모두 이 등대가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말한다. 기록에서는 등대가 높이는 약 103~108m, 가로 길이 약 20m 정도로 기록하였다. 아랍인들은 등대가 밝은 백색의 석회암으로 지어져 있었다고 썼고, 3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첫 번째 층은 사각형, 두 번째 층은 팔각형, 세 번째 층은 원통형의 모습으로 지어졌다고 하였다. 아랍 지리학자 알 이 드리시는 1100년도에 그가 등대를 직접 보고 난 후의 소감을 작성했는데, 그는 등대의 기저부의 벽돌들이 납으로 인해 서로 단단히 결합하여 있었고, 그 높이는 약 162m 정도로 추정하였다.
등대의 꼭대기에는 거대한 거울이 있어 낮에는 햇빛을 반사하여 빛을 냈고, 밤에는 불을 붙여 빛을 밝혔다. 등대 옥상의 네 모서리에는 트리톤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꼭대기에는 거대한 포세이돈 혹은 제우스의 신상이 항구를 굽어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면에는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헌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등대는 그 아름다움과 명성으로 인해 1183년 아랍의 지리학자 입은 주바 일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1303년과 1323년의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325년 이곳을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지진으로 한쪽 벽이 허물어져 내린 등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등대의 한쪽 벽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등대는 하늘 높이 솟은 네모난 건물로서 문은 지상에 나 있다. 문 앞에는 문 높이의 건물 한 채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나무판을 가로질러 놓아 문으로 통하게 하였다. 나무판만 치우면 속수무책이다. 문 안에는 등대지기가 앉을 자리가 하나 있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꽤 많다. 등대 내 통로의 너비는 9 쉬브르(약 2m)이고 벽 두께는 10 쉬브르(약 2.2m)이며, 등대 내란의 너비는 각각 140 쉬브르(약 31.5m)에 달한다. 등대는 시내에서 1 파르싸흐(약 6.24 km) 떨어진 높은 언덕에 있는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
참고로 이븐 바투타는 1349년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면서 등대를 보러 갔으나 그때는 이미 등대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바투타는 당시 술탄에게 건의하여 새로운 등대를 만들고자 했으나 결코 이뤄지지 못했고, 1480년 이집트의 술탄 하니 타봐 이가 등대의 잔해로 하니 타봐 이 요새를 만들면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
파로스 섬은 나일 삼각주 서부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알렉산드리아를 세웠고, 후에 알렉산드리아와 파로스 섬을 1 넘는 돌다리로이었다. 다리의 동쪽은 거대한 항구로 번성하였고, 서쪽에는 안쪽 분지를 확장하여 만든 유노스타스 항구가 들어섰다. 현대 알렉산드리아는 이 돌다리 안쪽의 바다를 메우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고대에 파로스 섬이었던 곳은 현재 '라스엘틴' 곶이라고 불리며, 이곳이 고대 파로스 섬의 유일한 잔해이다. 한때 등대가 서 있던 장소는 곶의 동쪽에 있으며, 현재는 바다에 의해 침식되어 모두 수면 아래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