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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로도스의 거상에 관한 정보

 

 

동상의 자세
우리가 현재 익히 알고 있는, 두 발을 항만에 걸치고 있고 그 사이로 배가 지나가는 모습은 중세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1395년에 한 이탈리아 방문자가, '신상의 오른쪽 발이 위치하던 곳에 현재 교회가 있고, 당시 신상은 땅과 바다 위에 존재했다'라고 쓴 기록에 근거한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미지가 굳어져 수없이 많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였고,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셰익스피어가 쓴 글이다.

"사람아, 왜 세계를 이렇게 좁게 보느냐,

마치 거상 아래에서, 우리와 같은 사소한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다리 밑을 지나며,

불명예스러운 무덤에 누운 우리를 발견할 뿐이다."

이런 신화적인 이미지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 각인되었으나,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동상은 이러한 형태를 띠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동상이 실제로 항구 입구의 한쪽 끝과 한쪽 끝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면, 동상을 세우는 동안 항구의 입구는 완전히 통제되었을 것이며, 고대 로도스 인들은 전혀 이런 피해를 감수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형태였다면, 거상이 무너진 후 땅 위에서는 거상의 잔해를 볼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고려하고서라도, 이런 형태로 청동판을 쌓아 올리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실제로 이런 형태로 지어졌다면, 거상은 지어지는 동안 다리가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또한 거상이 횃불을 들고 있었을 가능성도 적은데, 당시의 기술로는 이것이 힘들뿐더러 그런 언급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다만 로도스의 고대 기록에서 남아있듯이, 마치 사람이 태양으로부터 눈을 가리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한 아직 학자들은 거상의 얼굴과 머리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발굴된 로도스의 동전에서 나오듯이, 곱슬머리를 하고, 머리에서 금빛 혹은 은빛의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건조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마틴 헤임스케르크가 그린 제작 상상도
로도스 도시 국가 연합은 그들의 단일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데메트리오스가 버리고 간 군수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기념물을 만들기로 했다. 건축물의 지휘는 린도스의 카리스에게 맡겨졌다. 그는 20m가 넘는 제우스 상을 건조한 경험이 있는 리시포스의 제자였다. 또한 제작에 관여한 적이 있었던 로도스의 주민들도 협력했다.

동상의 제작은 약 기원전 292년에 시작되었다. 고대의 설명에 의하면, 로도스의 거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선, 로도스 항구의 입구 부근에 높이 15m(50피트)의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조 받침대를 설치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받침대가 항구의 방파제에 설치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 받침대 위에 철제 뼈대를 만들고, 더 얇은 동판으로 겉을 덮었다. 신상의 크기는 약 33m 정도 되었으며, 외장은 데메트리오스 군이 버리고 간 군수품을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신상의 하부공사에 공상 탑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신상을 지을 때 충분한 길이의 경사로를 이용하여 조립이 진행됨에 따라 경사로의 높이를 조절했고, 공사가 끝난 후 이 흙으로 된 경사로들을 모두 치웠다고 한다. 12년 후 이 거대한 신상이 완성되었고, 아래에 나오는 시는 신상에 헌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 태양이시여, 로도스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이 신상을 바칩니다. 올림포스의 신들께서는 전쟁의 파도를 가라앉혀 주셨고, 적들을 '물리쳐 주셨으며, 우리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안겨주셨나이다. 바다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자유와 독립의 횃불이 타오르나이다.' 위대한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바다와 땅을 통합했나이다."

신상이 서 있던 받침대는 지름이 최소 18m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아마 원형이었거나 팔각형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신상의 발은 대리석으로 깎았고, 얇은 청동판들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8개의 철골이 발에서 뻗어 올라가 무릎과 다리를 이루었으며, 위에서 서로 합쳐지며 몸통을 이루었다. 각각 독립적으로 주조된 청동판들에 뚫린 구멍에 고리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서로 이어졌다. 신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맨 아래쪽 청동판들은 약 25mm의 두께를 가지고 있었고, 무릎 위의 청동판은 약 20mm, 최상단의 판들은 약 6.5mm의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어깨나 목처럼 중요한 부위는 위쪽에 있을지라도 일부러 두께를 더 두껍게 만들었다.

 

로도스 공성전
기원전 16세기에는 미노스 문명의 사람들이, 그리고 기원전 15세기에 아카이아 인이 도래하였고, 기원전 11세기에는 도리어 인이 섬으로 왔다. 도리어 사람들은 후에 본토의 코스, 크니도스, 할리카르나소스 이외에 린도스, 이 알 자원, 카메이로스 라는 3개의 중요한 도시(이른바 도리어 헥사 폴리스)를 건설했다.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가 소아시아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면서 로도스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페르시아 전쟁 이후 기원전 478년에 로도스 섬의 도시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기원전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지만, 로도스 섬은 델로스 동맹의 일원에 있었지만 보였다. 전쟁이 끝난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 그리스는 피폐해졌고, 침략을 초래하게 되었다. 기원전 357년에 마우솔로스 왕에 의해 로도스 섬은 정복되었고, 기원전 340년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기원전 332년에 동정 중인 알렉산더 3세가 로도스 섬을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로부터 해방하여 자기 세력권의 일부로 삼았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마케도니아 제국은 대왕의 후계자들이었던 유력 장군들에 의해 분열되어 디아도코 이 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에서 로도스는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협력을 했다.

기원전 305년, 그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적대하고 있었던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40,000명의 군대를 주어 로도스에 파견했다. 하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도스의 요새는 단단했고, 데메트리오스는 공상 탑을 만들어 접근하려고 했다. 먼저 6척의 배에 공상 탑을 탑재해서 보냈지만, 폭풍우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다. 데메트리오스는 헬래? 폴리스(Helepolis)라고 불리는 대형 공상 탑을 제작하여 육상에서 로도스로 보냈다. 그러나 성내에서 출격한 로도스의 수비대가 헬래? 폴리스가 성벽에 도달하기 전에 막아내었다.

기원전 304년 프톨레마이오스가 파견한 군대가 로도스에 도착했기 때문에, 데메트리오스는 매우 당황하여, 서둘러 군대를 철수시켰다. 너무 갑작스럽게 철수를 했기 때문에 많은 군사 물자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의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많은 도시를 포위하여, 함락시켰기 때문에 폴리오르케테스(Poliorcetes 폴리스 포위자)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