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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 석상에 관한 정보 사라진 이스터 섬의 문명 이스터 섬의 문명이 몰락한 이유는 다른 문명의 예에서 본 것처럼 환경 파괴가 원인이 되었다. 1500년경 이스터 섬의 환경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화전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 나무들을 지나치게 벌채함으로써 토지는 황폐해졌고, 그 결과 급격하게 증가하는 인구를 전부 부양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결국. 어느덧 전쟁은 격화되어 상대 부족의 모아이 상을 파괴하는 일도 일어났다. 조상숭배 신앙을 가졌던 그들에게 신앙의 상징인 모아이를 파괴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치명적인 행위였다. 전쟁으로 인해 섬은 점차 피폐해졌고, 인구는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당시 제임스 쿡 제독은 "섬의 모든 사회가 붕괴 일보 직전"이라고 본국에 보고했을 만큼 모든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 더보기
알렉산드리아 등대에 관한 정보 발견된 대 등대 유적 1944년, 파로스 섬 하이트 베가 요새 부근에서 새로운 제방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물밑 공사를 위해 해저에 들어갔던 잠수부들은 우연히 고대 유적의 일부로 보이는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집트 정부는 제방 공사를 즉각 중지하고 프랑스 국립 연구조사 센터에 의뢰해 해저 유적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1995년 9월 18일부터 약 1개월 동안 잠수 조사를 벌인 결과, 모두 2천 점 이상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중 34점의 중요한 유물이 인양되어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견된 유물 중에는 알렉산드리아 대 등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길이 11.5m, 무게 4톤의 석재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파로스 반도 동쪽 끝 해저에서는 1열로 늘어선 조각상들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등대.. 더보기
마우솔로스의 영묘에 관한 정보 십자군 기사단이 파괴한 영묘 현재 영묘가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는 중심부의 기초 부분과 몇 개의 기둥만이 쓰러져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영화를 자랑했던 영묘가 왜 이 같은 폐허로 변해버렸을까? 영묘는 다른 많은 유적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18세기 초반 십자군 기사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 15~16세기의 유럽 사회는 신·구교의 갈등으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분열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2)과의 전쟁 등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격동기를 맞고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유럽 전체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십자군 기사단은 중요 거점을 사수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기사단은 요새와 성을.. 더보기
한옥에 관한 정보 크게 수직으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기둥과 가로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보로 나뉘는 구조다. 기둥 밑에는 주춧돌을 두어 땅속의 수분이 기둥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기둥과 보로 토대를 구성했으면 그 위로 서까래를 얹어 지붕의 뼈대를 만들고 널빤지와 기와를 얹는 식이다. 한옥의 모든 구조는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기와 - 흙 - 적심(흙을 받치기 위한 나무 껍데기 쪽의 널판자) - 개판(서까래 사이를 덮어주는 판자) - 서까래 - 도리(서까래 받침목; 통상 마지막 도리를 얹는 일을 상량이라고 한다.) - 장이어서(도리 받침: 원형의 도리는 돌아가기에 원형으로 홈을 파서 이 도리를 잡아주는 부재를 말한다.) - 보(제일 큰 보를 대들보, 그보다 작은 것을 증보라 한다.) - 창발(기둥과 기둥에 놓인 .. 더보기
경희궁에 관한 정보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더불어 경희궁도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시점에 경희궁 권역 내에 남아 있는 전각은 5개에 불과했다. 이는 일제가 간행한 '경성 부사' 뿐만 아니라 이전에 조선 측에서 간행된 자료인 '경복궁 연 건 일기'에 모두 일치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 부지로 이전해 왔다. 기존의 나무 위키 문서를 비롯한 대부분 문서에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쓰여 있는데, 사실 일본은 경희궁 터에 있는 비어있는 공터에 경성중학교를 신축했을 뿐, 경성중학교 건설 때문에 전각을 철거하지는 않았다. 1915년에는 신문.. 더보기
덕수궁에 관한 정보 인조 발전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300년 후인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하게 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하게 된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고, 이후 대한제국의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만 1907년 11월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 하면서 법궁(황궁)의 지위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이 이어 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혀 있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거울 궁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고 이제는 고작 2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 더보기
창경궁에 관한 정보 2006년 4월 창경궁에 들어온 한 노인이 창경궁 문정전 문에 불을 지르다가 경찰에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이 노인이 바로 2년 후 숭례문에 불을 지른 당시 67세의 채종기로 알려졌다. 그는 2006년 창경궁에 이어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문화재 연쇄 방화범으로 알려졌는데 창경궁 문정전 방화 때는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숭례문 방화 사건 때에는 대한민국 문화재 보호법 위반 및 문화재 방화 혐의에 따라 구속되었고 징역 10년이 확정되어 복역했고 2018년 2월 만기 출소했다. 당시 창경궁 문정전은 문짝에만 화재 손해를 입었을 뿐 전각 전체는 무사히 온전하였다. 목조건물은 심각하게 화재에 취약해서 5분 안에 진화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때 빠르게 소화기로 불을 끈 사람은 문화재청.. 더보기
창덕궁에 관한 정보 지금은 입장 통제 등의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권역상으로도, 행정 관리상으로도 분리되어 있지만 3곳은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하여 두 궁을 합쳐 "동월 東闕"(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불렀다. 종묘의 경우 제례 공간으로써 일상생활과 정치를 펼치는 궁궐과 성격상은 판이하나,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뻗어 나와 있는 야트막한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 地脈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했다. [13] 현재는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도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14]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 강점기에 율곡로를 뚫으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