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경복궁에 관한 정보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8]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리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9]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 [10]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무학 대사가 2가지 예언을 했는데, 첫 번째 예언과 두 번째 예언은…. [11] 당연히 위.. 더보기
콜로세움에 관한 정보 이름 콜로세움의 본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다. 이와 같은 이름은 네로 황제를 쫒아내고 즉위한 풀어라. 비안 황소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인데, 다만 현대에는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이라는 단어가 로마 시에 있는 건물에만 국한된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지은 경기장에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콜로세움이라는 단어는 근처에 서 있었던 거대한 네로 황제의 동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조각상은 후대의 황제들에 의해 개조되어 태양신 헬리오스의 동상으로 바뀌었다. 중세 시대에 헬리오스는 이교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데에 반해, 이 동상은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 더보기
루브르 박물관에 관한 정보 회화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소장품은 13세기부터 1848년까지의 작품들로 약 6,000점 이상이며 소장품의 전시를 총괄하는 12명에 이르는 큐레이터에 의해 관리된다. 이중 약 2/3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고 약 1,200점 이상이 북유럽 작품이다. 이탈리아 회화는 대부분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4세의 유품으로 남겨진 소장품들로 구성되었고 몇몇은 나폴레옹시대의 전리품으로 들여왔다가 그대로 남은 것들이며 몇몇은 사들인 것들이다. 소장품의 수집은 프응아닝 시대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탈리아의 거장들로부터 작품을 들여왔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그의 궁정으로 데려오기도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실의 수집품은 루브르의 핵심을 이루었다. 1986년 오르세(d'Orsay) 기차역이 오.. 더보기
노인슈반슈타인 성에 관한 정보 퓌센의 동쪽에 있는 이 성은 부왕(父王) 막시밀리안 2세가 사들인 슈방가유 재지귀족(在地貴族)의 옛 성채의 하나로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였으나 1886년 루트비히의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남아 있다. 루트비히가 1867년에 방문한 바 있는 발트부르크 성채와 베르사유궁전 등을 그 전형으로 삼았다. 독특하고도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성으로, 이 성을 본떠 만든 것이 바로 디즈니랜드 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이슈반스타인 성 [Neuschwanstein] (두산백과) 외관은 중세지만,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전화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명의 이기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크리스티안 야크(1833~1888년)의 원래 직업은 무대 감독이었으며, 노이슈반.. 더보기
자유의 여신상에 관한 정보 유래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전시된 우상부 설계 및 건설 1865년 프랑스의 역사학자에도 아으 라불라예가 남북전쟁 후에 자유의 여신상 건립을 제의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유니언)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던 라블레는 베르사유 근처의 집에서 열린 석찬 대화에서 "독립기념물로서 비가 미국에 세워져야 한다면, 나는 공동의 노력, 즉 우리 두 나라의 공동작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은 2000년 보고서에서 이 전설은 1885년 기금모금 팸플릿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 상은 1870년에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디자인은 1874년에 라블레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에게 의뢰를 하였다. 설계는 에펠탑으로 잘 ​​알려진 구스타브 에펠도 참여했다. 자유의 여신상 .. 더보기
에펠탑에 관한 정보 에펠탑의 디자인 자재 에펠 탑의 금속 구조 전체의 무게는 총 7, 비금속 자재를 포함하면 대략 10,000톤이 된다. 이 7 금속 구조물을 녹일 경우, 금속이 세제곱미터 당 7.8 톤의 밀도로 채워진다고 할 때 125 x 125m의 네모난 틀에 고작 6cm밖에 채워지지 않게 된다. 가장 낮은 온도에서 탑의 높이는 위로부터 18cm가량 줄어들게 되는데 이는 금속의 열적 팽창(수축)에 따른 것이다. 바람에 대한 고찰 탑이 지어졌을 당시, 사람들은 그 대담한 모양에 놀라워했다. 에펠은 이 예술적인,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 비예술적인 것을 만드는 데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기술이 아닌 그 디자인에 대해 욕설을 들었다. 하지만 에펠과 그의 기술자들은 숙련된 다리 건설자로서 풍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만일 .. 더보기
노트르담 대성당에 관한 정보 개축, 파괴, 그리고 복원 1548년 위그노 들이 그러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대성당의 성상들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대성당의 외관을 파괴했다. 루이 14세 때와 루이 15세 때에 전 유럽에 걸쳐 대성당들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목적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을 개축하였다. 무덤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제거되었는데, 다행히도 북쪽과 남쪽의 장미 창은 파괴되지 않았다. 복원 계획에 따른 성당 조각 1793년 프랑스 혁명 때에 노트르담은 이성숭배에 봉헌된 뒤, 최고존재숭배에 봉헌되었다. 이 시기 동안 대성당의 많은 보물은 파괴되거나 강탈당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다 왕들의 조각상들이 (봉건질서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왕들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많은 머리가 1977년에 인근을 발굴하면서 발견되.. 더보기
파로스 섬의 등대에 관한 정보 고고학적 발굴 1968년, 유네스코는 일련의 수중 고고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파견하였고, 이 조사로 인해 등대의 잔해가 세상에 처음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이 군사 지역으로 지정되고, 고고학자들의 인력 부족으로 이 발굴은 잠정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자이브 앙페레가 알렉산드리아 동쪽 항구의 바닷속에서 등대의 잔해를 발견하였고 1995년 공개하였다. [6] 확실한 사진을 얻기 위해 특수 제작된 카메라를 이용하였고 인해 수중에서 무너진 기둥과 벽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주요한 발견으로는 49~60톤에 달하는 석회암과 30개의 스핑크스, 5개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또한 통해 람세스 2세 당시의 유물을 다시 복원하기까지 하였다. 이 유물들은 현재 알렉..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