퓌센의 동쪽에 있는 이 성은 부왕(父王) 막시밀리안 2세가 사들인 슈방가유 재지귀족(在地貴族)의 옛 성채의 하나로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였으나 1886년 루트비히의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된 채 남아 있다. 루트비히가 1867년에 방문한 바 있는 발트부르크 성채와 베르사유궁전 등을 그 전형으로 삼았다. 독특하고도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성으로, 이 성을 본떠 만든 것이 바로 디즈니랜드 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이슈반스타인 성 [Neuschwanstein] (두산백과)
외관은 중세지만,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전화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명의 이기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크리스티안 야크(1833~1888년)의 원래 직업은 무대 감독이었으며, 노이슈반스타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단순히 중세의 성을 충실히 재건한 것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비잔틴, 고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다. 모든 방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그 밖의 바그너 주제를 묘사한 조각과 프레스코를 볼 수 있으며, 성 전체로 보았을 때는 중세의 성배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1864~1886년 재위)는 왕이 된 지 2년 만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그는 고결한 왕들과 강인한 게르만족 신화 속의 신들이 사는 바그너 풍의 몽상 세계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그는 산꼭대기의 어린 시절 고향에 틀어박혀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비롯한 환상적인 중세의 성을 짓는 데에 여생의 대부분과 재산의 전부를 쏟아 부었다. 188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지만, 노이슈반스타인의 방들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수많은 엽서, 퍼즐, 광고는 물론 저 유명한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까지 된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역사상 가장 극적인 성 중의 하나로, 노이슈반스타인이 세워지게 된 경위 또한 성 자체만큼이나 잊히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이슈반스타인 성 [Schloss Neuschwanstein]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크 어빙, 피터 ST. 존, 박 누리, 정상희, 김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역사
대포의 발명으로 성이 이미 쓸모가 없어진 시대였으므로 루트비히 2세는 순수히 취미로서 성을 지은 것이다. 이 순수한 취미 때문에 바이에른 경제는 파탄이 났다[1].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는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버리라고 유언했다. 물론 성은 관광지로 최고였으므로 부서지지 않고 지금도 바이에른의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어 있으며,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도 이 성을 본뜬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루트비히 2세와 같은 말을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성은 부서지지 않았다
이 기획은 1862년 그가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그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건설하기 전 뮌헨 왕궁의 통로에 바그너가 쓴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고, 치에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궁전을 짓게 하는 등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바그너를 다시 불러 자신에 구상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바그너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자, 국민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축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루트비히 2세는 의욕상실에 빠졌고, 퇴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구상을 떠올리면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바르트부르크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성을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편에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지형이 험해, 그의 계획대로 성을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성은 애초 계획과 다른 새로운 형태로 수정 계획되었고, 1868년 건설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루트비히 2세는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광적으로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노이슈반스타인 성 외에도 다른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짓게 되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왕위에서 퇴위당했고, 퇴위당한 지 3일 만에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사인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부왕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백조의 성'이라 불리던 폐서 호엔슈방가우 성을 사들여 고딕 양식으로 개조, 재건축하였고,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다. 때문에 루트비히 2세는 어렸을 적부터 건축에 대해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한 오페라 작품들을 썼고, 이 때문에 루트비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도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호엔슈방가우 성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물들을 건설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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