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콜로세움의 본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다. 이와 같은 이름은 네로 황제를 쫒아내고 즉위한 풀어라. 비안 황소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인데, 다만 현대에는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콜로세움'이라는 단어가 로마 시에 있는 건물에만 국한된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지은 경기장에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콜로세움이라는 단어는 근처에 서 있었던 거대한 네로 황제의 동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조각상은 후대의 황제들에 의해 개조되어 태양신 헬리오스의 동상으로 바뀌었다. 중세 시대에 헬리오스는 이교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데에 반해, 이 동상은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파괴되지 않고 계속 보존될 수 있었고, 무언가 마법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가 지속해서 쇠퇴하고, 사람들은 청동을 녹여 사용하기 위해 동상을 무너뜨려 버렸고, 그 기단만이 남아있다.
용도
콜로세움은 검투사 경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의 주최 지로 사용되었다. 이 공연들은 항상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주최하는 행사들이었으며, 주최자의 권력과 부를 과시할 기회였으며 인기를 얻고 가문의 명예를 높일 방법이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공연은 동물 사냥이었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입한 야생동물들을 활용하였는데, 코뿔소, 타조, 호랑이, 사자 등이 주요 구경거리였다. 사냥은 움직일 수 있는 나무들과 건물들이 있는 정교한 세트장에서 진행되었고, 대중들은 이와 같은 방식에 열광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를 정복한 기념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는데, 11,000마리의 동물들과 10,000명의 검투사가 이때 희생되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4]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은 알몸으로 맹수 앞에 서게 되고, 산채로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도중, 마술사나 곡예사들이 나와 군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콜로세움 초기에, 이곳에서는 모의 해상 전투가 열렸다고 한다.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가 개최한 행사에는 특별히 조련된 동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경기장을 물로 채웠다는 기록들이 있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해상 전투를 재현한 행사도 열렸었다고 한다. 다만 이 경기장에서 어떻게 물이 새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는지, 군함이 들어올 정도로 충분한 크기가 있었는지, 어떻게 물을 끌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콜로세움의 야경
경기장에서는 종종 실제 관목과 숲들도 옮겨져 전시되었다. 이처럼 만들어진 세트장은 신화의 이야기나 영웅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때때로 죄인이 짐승들에게 산채로 으깨지거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잔인한 행사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콜로세움
콜로세움(Colosseum, 이탈리아어: Colosseo 콜로세오[*])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 등으로 지어져 있고,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고,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동상(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8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1]
콜로세움은 수 세기 동안 계속 개축되어왔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다만 중세에 이르러 제국이 쇠퇴하고 로마가 폐허로 변하자, 콜로세움도 이와 같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채석장, 요새, 교회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콜로세움은 강도, 약탈, 채석과 같은 파괴 행위로 상당 부분이 손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로마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며 2018년에는 480만 명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콜로세움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는 5센트 유로화 동전에도 새겨져 있다.
고대 로마 제국
본디 콜로세움의 위치는 주거지역이었다. 하지만 서기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나고 그곳에 서 있던 건물들이 모두 타버리자 네로 황제는 현재 콜로세움이 서 있는 자리, 즉 팔라티노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 사이에 거대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과 인공 호수, 정원들을 지었다. 기존 수로들이 이 정원에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거대하게 개축되었고, 궁전과 정원들은 모두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또한.
네로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는 살해되었다. 후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의 궁전을 헐어버린 후, 그 부지에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이와 같은 결정은 황제의 사유지였던 공간을 다시 군중에게 돌려준다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깃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근처에 검투사 양성 학교, 기타 지원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원형극장들이 주로 도시의 외곽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독특하게도 도심의 한가운데에 정확히 계획되어 지어졌다.
70년경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가져온 황금과 부를 사용하여 콜로세움의 건축에 보태기 시작하였다.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대 원정의 전리품들을 콜로세움의 건축에 사용할 것을 명령했고 전리품과 함께 들어온 10만 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건축에 동원되었다. 노예들은 로마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을 옮겨 왔고, 로마인 건축가들과 전문가들이 더욱 전문적인 작업들을 수행하였다. 콜로세움은 목재, 응회암, 석회암, 콘크리트, 타일과 같은 재료로 지어졌다.
콜로세움은 서기 70~72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79년에 콜로세움의 3층이 완공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티투스 황제 치세 하에 완공되었다. 80년에 건축이 완료된 콜로세움의 개막식에는 9,000마리가 넘는 야생 동물들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주화까지도 발행되었다. 콜로세움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개축되어 콜로세움 하부에 지하 터널이 생겼으며, 좌석 수도 많이 늘어났다.
217년, 콜로세움에 낙뢰로 인한 화재가 일어나 목재로 지어진 상층부가 전소했고, 240년까지 복구되지 않다가 250년에 완전히 복구되었다. 443년에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 콜로세움을 다시 복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기장은 6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고, 동물 사냥은 적어도 523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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