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입장 통제 등의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권역상으로도, 행정 관리상으로도 분리되어 있지만 3곳은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하여 두 궁을 합쳐 "동월 東闕"(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불렀다. 종묘의 경우 제례 공간으로써 일상생활과 정치를 펼치는 궁궐과 성격상은 판이하나,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뻗어 나와 있는 야트막한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 地脈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했다. [13]
현재는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도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14]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 강점기에 율곡로를 뚫으면서 지맥을 훼손하고 길을 뚫어 강제로 분리됐다. [15]
정리하자면 과거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현재는 물리 상으로나, 행정 관리상으로나 모두 분리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위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데, 순정효황후는 1966년까지,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1989년까지 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영친왕과 그 아들 이 구의 장례식은 각각 1970년, 2005년에 거행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조선왕조의 최후를 장식한 궁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곳이다.
2010년 5월 1일 자로 후원 등 일부를 제외하고 전면 자유 관람으로 바뀌었다. [16][17] 후원(금액)의 경우 정해진 시간마다 해설사를 동행하여 약 100여 명의 일정한 인원만이 입장 가능하며 관람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다. 사실상 창덕궁의 명소로 꼽히는 곳은 후원이기 때문에 창덕궁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자유 관람뿐만 아니라 해설사와 같이 들어가는 코스도 가봐야 한다. 관람객으로서는 이렇게 제한을 둬서 출입을 통제시키는 게 불편한 점도 있지만 통제된 만큼 내부 환경, 특히 자연경관의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간단한 음료수 이외의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후원 내에도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단가가 높은 편이므로 음료수는 미리 준비해 가는 편이 좋다. 특히 여름에 매점에서 판매하는 부채의 경우 같은 물건을 바로 밑의 인사동에서 반값에 팔고 있다. [18] 기념품을 사고 싶다면 인사동이나 후원 입장 전의 기념품 관에서 사면 된다.
후원은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후원 특별 관람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단풍철인 11월은 후원 관람의 극성수기에 해당해서 인터넷으로 예매하려면 광클은 필수다. 예약 취소분은 현장에서 판매하지만 좋은 철에는 예매 경쟁이 치열해서 떨렁 떨렁 가면 빈자리가 안 난다.
그리고 돈화문에서 후원 입구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기 때문에 관람 공지에서도 출발 20분 전까지는 도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매표에서는 시간을 초과하면 취소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거 없고, 예매표만 인터넷에서 출력해가면 판매는 한다. 단 해설사는 지각자를 기다려주지 않으므로…. 최소한 출발 정각까지는 가야 따라 들어갈 수 있다.
야간관람으로는 "창덕궁 달빛 기행" 이란 주제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두 달 정도 표 사전예매 식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표가는 3만 원이다. 한동안 특별관람으로 개방하다가 2011년 이후로 개방하지 않는 낙선재의 뒤뜰(상량 정부분)도 짤막하게나마 들어갈 수 있으므로 관심이 있고 아름다운 창덕궁의 야경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하자.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 내국인은 한국어 이외의 코스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괜히 예약하고 헛수고하지 말자. [19]
참고로 덕수궁, 경복궁과 함께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덕수궁과 함께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궐 내부에 양 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일부 주요 전각들이나 내부는 서양식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 격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 내부에는 전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 내부에 개인 소유 2층 주택[20]이 있고 그로 인해 일부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였다고 한다. 나라의 문화재가 사유지로 팔렸다는 것도 황당한데 담장을 헐고 철문을 짓는 등의 훼손이 이루어졌음에도 법적으로 해결할 방안이 없다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15억의 매매가를 제시했으나, 건물 소유주 측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바라는 듯하다.
2015년 7월, 문화재청이 낙선재 권역을 외국인을 위한 고가(1박에 300만 원)의 숙박시설로 개방하는 ‘궁 머무름’을 추진해 논란이 일어났다.
대중교통으로는 정문인 돈화문 인근에 서울 버스 109, 151, 162, 171, 172, 272, 710 등이 정차한다. 전철은 안국역이 가장 가깝다.
2018년 9월 10일에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맞이하는 국빈행사가 열렸다. # 창덕궁에서 국빈 환영식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행사를 계기로 앞으로도 자주 쓰일 듯하다.
태조는 조선 건국 3년 차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 도를 결정했다. 재천 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어이구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405년에 완공되었고 그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태종은 창덕궁이 완공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 했다. [8] 140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9]
140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춰진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된 이후에도 창덕궁은 계속 증축되었다. 14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이 세워졌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이 완공된 후 1406년부터 태종은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 데다가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 위주로 지어졌다. 그래서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은 매우 조촐하게 지어졌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은 3칸 규모의 작은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해야겠다면서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는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하였는데, 이때의 공사로 인정전이 5칸 규모로 재건축되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를 중시하는 등 전례를 엄격하게 존중해서 지어져 있지만,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다. 심지어 궁궐의 정문과 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창덕궁의 지형이 주변 언덕과 어우러지고자 했으며, 특히 창덕궁 내에 있는 종묘를 묘로 봤을 때 주변의 언덕은 풍수지리상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다른 동양의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며, 창덕궁은 한국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밀어내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이 영향이 크다.
이렇게 과감한 배치를 한 인물은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이다. 그는 출신이 미천하지만, 재주가 뛰어남을 인정받아 일찍 발탁되어 오늘날의 장관급인 공조판서까지 오른 사람이다. 아무튼 1419년(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박자청을 하옥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 밖의 마당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하였다는 명목으로 하옥시키고 상량까지 한 행각(복도로 쓰이는 건물)을 부숴버리라 명했고, 그곳에는 담만 쌓게 하였다. 하지만 결국 한 달 후에 박자청은 사면되어 이후로도 계속 이 공사 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후에 창덕궁 역시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 그대로 행각이 지어졌다. 즉,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란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이다.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 대한제국시대의 궁궐 중 하나로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5]
1404년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 한양 재천 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다. [6] 조선 전기에는 정궁 경복궁에 이은 제2의 궁궐 역할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정궁의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과 양 궐 체제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과 양 궐 체제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 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 못지않게 쓰임새가 잦았던 궁궐이었고, 반대로 조선 후기에는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용하느라 창덕궁을 떠나 있었을 때도 잦았다.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1907년 순종이 이 어해 다시 황궁이 되어 마지막 순간의 대한제국과 그 운명을 함께했던 궁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조선 시대 내내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며, 조선 시대 내내 양 궐 체제에서의 실질적인 두 법궁의 지위를 유지한 유일한 궁궐이다. 또한. [7]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들이 거주하였고 조선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궁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이 꼽혀야 한다는 말이 실로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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