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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덕수궁에 관한 정보

인조 발전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300년 후인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하게 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하게 된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고, 이후 대한제국의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만 1907년 11월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 하면서 법궁(황궁)의 지위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이 이어 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혀 있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거울 궁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고 이제는 고작 2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러시아 공사관, 미국 공사관, 영국 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11] 참고로 러시아 공사관과의 거리는 10m가 채 되지 않았으며 만약 육로로 못 갈 때 안전하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과 연결된 지하벙커(지하도)까지 건설했다. 사실 러시아 공사관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인근이 미-영 공사관이 있는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인근에 있는 외국 공사관만 해도,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인근에 있었다. 이 지역이 바로 개항 시기 외교관들을 정동구락부라고 부르게 했던 바로 그 정도, 공사관 구역이었다. 아관파천 이전에는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까지 득시글거려서 한양 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이 지역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 사변을 기억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러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이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즉 조당과 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이 급한 대로 지어진 상태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했다(1897년). 정전으로는 1902년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간 즉 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뿐이었기 때문에 그냥 궁궐을 하나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떠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이나 경희궁의 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석조전과 돈덕전, 정관헌 등 서양식 전각도 건립해 나갔다. 당시 경운궁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겨 세워진 건축물들은 회 안전, 문경전, 대원전 축대, 흥복전 행각, 다 경합, 만화당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 만 화당은 경운궁의 함녕전으로 개축된다. 

1902년 경운궁 공사는 일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 [12] 그때까지 경운궁은 5년 동안이나 즉 조당을 제국의 정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월산대군[4]의 저택이었으나[5]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환도한 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려 거처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군 또는 정릉동행 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궁궐 공간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불편이 야기 되었기 때문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연결하여 썼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 나중인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중화전 일대와 석조전을 제외하고, 즉 조당과 석어당 등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전각들은 궁궐이라기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이 정릉행군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2003~04년 동안 방영했던 SBS 사극 왕의 여자는 이 정릉동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궁궐 세트가 아니라 대감 집 느낌 나는 세트에서 선조 후반 및 광해군 초반의 시기가 다뤄졌다. 심지어 동궁(태자궁)은 초가집이었다. [6] 배우 개그의 건물 버전으로 용인 한국민속촌의 중부지방 양반가 22호는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의 사저이자 후에 월산대군이 물려받는 집으로 등장하였다가 왕의 여자에서 경운궁으로 출연하였다.

 

광해군 원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간 정릉행군에 계속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돌아와 장기간 거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풍수 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비늘줄 기고,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는 것을 무척 꺼렸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행군에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구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비늘줄기 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게 되자 물자가 부족하게 되어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 즉 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수하였지만,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 만큼은 용하게도 손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능양군(인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뜻밖에 인목왕후가 "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 싸움을 벌였다. 조선에서 즉위 절차상 대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대비가 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7] 게다가 능양군 측은 반정으로 정권을 찬탈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왕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였던 만큼, 인조가 절대로 인목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렀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8] 즉위한 지 3달 후 인조는 즉 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한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9][10]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2채의 전각만이 남아 정릉행군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별궁 정도로만 여겨지며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99 (정동) 서울특별시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시대에 지어진 궁궐.

덕수궁은 원래 수빈 한씨(훗날의 인수대비)가 남편 의경 세자의 사망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어[1][2] 궁궐을 떠나 살게 되면서 시아버지인 세조가 특별히 수빈 한 씨와 그 소생의 월산 군, 자을산군, 명숙 공주가 기거할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해 지은 사저(私邸)였다. 이후 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 모후인 수빈 한 씨도 왕대비가 되어 대궐로 들어가게 되자 이 집은 월산대군의 소유가 된다. 한참 후 임진왜란 후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조하여 임시 거처인 정릉행군으로 사용된 것이 시초다.

이후에는 창덕궁이 중건된 후 잊혔다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1897년에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해 10년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됐다.

구한말 격변기에 조성된 궁전이기 때문에 2층 한옥인 석어당뿐만 아니라 서구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 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 서로 다른 특이한 양식의 건물이 많이 모여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난을 당했으며, 현재는 대한제국 시절의 1/2 이하로 그 면적이 줄어들었다. 덕수궁 주변에는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로마네스크)과 성가수녀회 본원(한옥), 영국ㆍ러시아ㆍ캐나다 대사관, 덕수초등학교 등도 자리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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