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창경궁에 들어온 한 노인이 창경궁 문정전 문에 불을 지르다가 경찰에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이 노인이 바로 2년 후 숭례문에 불을 지른 당시 67세의 채종기로 알려졌다. 그는 2006년 창경궁에 이어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문화재 연쇄 방화범으로 알려졌는데 창경궁 문정전 방화 때는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숭례문 방화 사건 때에는 대한민국 문화재 보호법 위반 및 문화재 방화 혐의에 따라 구속되었고 징역 10년이 확정되어 복역했고 2018년 2월 만기 출소했다.
당시 창경궁 문정전은 문짝에만 화재 손해를 입었을 뿐 전각 전체는 무사히 온전하였다. 목조건물은 심각하게 화재에 취약해서 5분 안에 진화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때 빠르게 소화기로 불을 끈 사람은 문화재청에서 감사의 뜻으로 고궁 평생 무료입장권을 줬다고 한다.
1418년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건립 당시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의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1]으로 지었다.
태종 사후에 한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제9대 성종이 세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생모이자 대비인 소혜왕후, 제8대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1483년~14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구역을 확장했고, 창상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으로 고쳐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하였다. [2] 궁궐의 소실주체로는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설, 선조의 몽진 후 한양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민중들에 의해 발화된 것 아닌가 하는 설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군 종군 승의 일기 기록에 왕궁에 대한 묘사가 쓰여 있으며, 이는 선조가 대피한 후 왜군이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반면 종묘의 경우 확실히 왜군에 의해 불에 탄 것이 확실하며, 민중이 불태웠다는 기록은 풍문이 그렇다 하더라 정도의 기록이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리하자면 의도적 방화건 실화로 인한 것이건 조선 백성에 의한 것이라면 왜군의 진입 전/ 철수 후이거나, 왜군에 의한 것이면 한양 진입을 한 직후 승리감에 도취해 바로 방화를 했거나, 주둔하다가 종묘를 불태우는 과정에서 모두 불태웠거나로 정리할 수 있다.
광해군 7년 때 중건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창경궁은 조선 전기보다 쓰임새가 대폭으로 커지게 되었고 여러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타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손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하는 등 큰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난리 통에도 명정전, 문정전, 어휘당, 환취 정 등 일부 전각이 살아남았기에 인조 11년 인정전 하나만 남아있던 창덕궁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제19대 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제21대 영조 때는 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서 요절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의 아들 제22대 정조가 1800년 6월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지만 만든 잔재이니만큼 궁궐로 복원해야 한다는 움직임에 따라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궁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복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적 고증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계획에 따라 창경궁에 있던 유원지는 놀이기구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1단계(2015년~2021년) 및 2단계(장기 계획)에 걸쳐 창경궁을 원형 복원하겠다는 태도를 밝혔다. 기사 덕수궁과 경복궁 또한 동시에 정비되고 있는 만큼 예산 부담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지상 보행길 복원에 들어가 율곡로는 지하 터널로 이어지고 지상에는 담장과 보행 길이 함께 조성될 예정이다. 기사
2019년 1월 1일부로 덕수궁과 마찬가지로 상시 야간개장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궁궐 복원에 따라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연결되어 돌궐로 불리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궁궐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창경궁을 훼손하며 궁내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조성하여 유원지로 만들었다. 이는 독립 이후에도 이어지다가 유원지 시설은 1983년~1986년에 철거되어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창경원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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