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더불어 경희궁도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시점에 경희궁 권역 내에 남아 있는 전각은 5개에 불과했다. 이는 일제가 간행한 '경성 부사' 뿐만 아니라 이전에 조선 측에서 간행된 자료인 '경복궁 연 건 일기'에 모두 일치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 부지로 이전해 왔다. 기존의 나무 위키 문서를 비롯한 대부분 문서에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쓰여 있는데, 사실 일본은 경희궁 터에 있는 비어있는 공터에 경성중학교를 신축했을 뿐, 경성중학교 건설 때문에 전각을 철거하지는 않았다.
1915년에는 신문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남쪽으로 옮겨 세웠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전각들을 차례로 매각했다.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을 부순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째로 매각했다. 그래서 숭정전, 흥화문 등이 다른 장소에서라도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훗날 경희궁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흥화문은 다시 경희궁으로 되돌아 왔다. 동국대가 절로 전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은 경희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카피하여 복원시켰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매입한 후 현재의 위치(동국대학교)로 옮겨 세워져 법당으로 마개 좋아야 사용했다. 참고로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 [7] 해방 이후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흡수되었고,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동국대학교의 법당 '정각원'으로 쓰이게 되었다. 1976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세워졌다.
정문인 흥화문은 일본사찰인 박문상(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방문서(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에 당사당)에 당)에 매각되어 박문상의 산문으로 쓰게 되었다. 해방 이후 박문서 자리에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74년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1988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원래 흥화문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들어선 관계로 개량문이 있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경희궁 외조 남쪽 문인 개량문은 남산에 있는 일본사찰 서본 원사에 매각되어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경성방송국을 거쳐 1964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문인 대성문으로 사용되어 60~70년대 성균관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차량통행에 방해되어 1976년 석조교문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는 서울역사박물관 측의 조사 내용인데, 일부에서는 1904~05년에 촬영되어 꼬리에 꼬래 아니게 수록된 사진을 보면 개량문의 흔적이 없으므로 애초에 경복궁 중건 때 소실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1930년대 초에 이르러 경희궁 전각은 100% 완전히 소실되었다.
1943년~44년에는 폭격을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가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인근의 경성중학교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대규모로 축조했다. 다만 경성중학교 재학생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국의 청소년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만든 것이다.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용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 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1]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경희궁의 원래 이름)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 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정원 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돌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 궐 체제하의 이 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 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이 경희궁을 이 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과 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아래에 상설되어 있듯이 고종 즉위 직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동안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2] 원래 경희궁에는 100여 동의 전각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어 경복궁의 궐내 각사와 나인 전 건설에 사용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일본강점기가 아닌 조선 말기에 경희궁이 대거 훼손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 도시 전설에 가까운 얘기로 치부되었지만, 최근에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학계를 제외하면 어떠한 대외적인 자료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아 대다수 국민은 아직도 경희궁이 일제에 만행 때문에 파괴된 것으로 알고 있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 연 건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 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 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 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 인간(內 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국권침탈 이후 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 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숭정전, 회상 전, 흥성당, 흥화문, 황학정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 연 건 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경복궁 연 건 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이 마친 후 경희궁의 영동 궁, 진찰 궁, 어의군.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 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해 2년 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가 들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양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 지에서 1883년 경희궁 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호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된 이 궁으로,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어이구)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월'에 대비되는 이름인 '서궐西闕(경복궁의 서쪽 궁궐)'어로로 불렸다.
경희궁은 100% 일제의 만행 때문에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어. 많은 국민이 공분하며 일제를 규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강점기 이전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헐렸다. 일제가 경희궁에 손댄 거라곤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를 통째로 외부에 매각한 것뿐이다. 그러나 문화재청 등에서 발간한 여러 자료에는 이러한 사실이 일절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일제에 의해서 훼손되었다고만 적혀 있으므로 일반에게는 이러한 내막이 거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도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최근에 발표된 학술논문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게다가 광복 후에도 경희궁 터 위에 지어진 서울고등학교의 존재 때문에 한동안 복원은 꿈도 꾸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 서울고가 이전한 후에야 경희궁 터의 본격적인 유적 발굴과 복원을 할 수 있어졌다. 그러나 경희궁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경희궁 터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시가 잽싸게 그 자리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짓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도리어 경희궁 유구가 더욱 훼손되고 말았다. 게다가 서울시는 잔여 경희궁 터를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땅값이 너무 비쌌던 데다가 당시에도 경희궁 부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매각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근성의 서울시는 그 땅이 경희궁으로 온전히 복원되는 것을 저지하고 끝끝내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경희궁의 잔여 유구를 훼손하고 말았다. 또 일부 부지는 서울시가 끝내 민간으로 매각해버렸고 이것이 현재 경희궁 완전 복원의 걸림돌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남은 전각이 적고 협소한 탓에 조선 5대 궁궐 중 인지도가 가장 낮다. 1박 2일의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특집에서도 5대 궁궐을 문제로 내자, 다른 4개의 궁은 어렵지 않게 맞혔으나 경희궁에서 다들 헤맸는데,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이나 역 광적인 팬이 아닌 이상 다른 일반인에게도 사정은 비슷할 듯 훼손이 너무 심하다 보니 책에 따라선 4대 궁을 먼저 묶은 뒤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 터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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