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수직으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기둥과 가로로 하중을 지탱해주는 보로 나뉘는 구조다. 기둥 밑에는 주춧돌을 두어 땅속의 수분이 기둥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기둥과 보로 토대를 구성했으면 그 위로 서까래를 얹어 지붕의 뼈대를 만들고 널빤지와 기와를 얹는 식이다.
한옥의 모든 구조는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기와 - 흙 - 적심(흙을 받치기 위한 나무 껍데기 쪽의 널판자) - 개판(서까래 사이를 덮어주는 판자) - 서까래 - 도리(서까래 받침목; 통상 마지막 도리를 얹는 일을 상량이라고 한다.) - 장이어서(도리 받침: 원형의 도리는 돌아가기에 원형으로 홈을 파서 이 도리를 잡아주는 부재를 말한다.) - 보(제일 큰 보를 대들보, 그보다 작은 것을 증보라 한다.) - 창발(기둥과 기둥에 놓인 나무 이곳에 보를 올려 보의 무게로 인한 흔들림을 옆의 기둥이 함께 잡아준다.) - 기둥 - 주춧돌 - 흙의 순으로 지붕 전체의 무게가 내려오는 구조이다. 기와까지 올라갔을 때 한옥 지붕의 무게는 톤 단위로 계산될 정도로 무거워진다. 기와 한옥은 이를 버티기 위해 기둥의 크기가 최소 7치(지름 21cm가량) 이하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초가 한옥은 지붕의 무게가 가벼워 통상 4치(12cm)가량이면 건축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가장 큰 지붕을 가진 사찰이나 궁궐의 경우에는 최소 1자(지름 30cm) 이상의 나무가 기본적인 크기가 된다. 이는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데 대들보 위에 증여를 놓고 바로 서까래를 걸면 천장의 크기가 높지 않다. 이는 아래와 위의 크기가 같아야 하는데 예전이라도 지름도 크고 높이도 큰 나무를 구하기 쉽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운반상의 어려움이 있었고, 현재로써는 그런 지름도 크고 길이도 긴 나무 자체를 구하기 쉽지 않다. 불상을 모셔야 하는 절이나 위엄(크기)을 갖추어야 할 처지의 궁궐 건축에서는 낮은 천장은 선호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포를 포개어 쌓아 놓고 도리의 높이를 강제로 높인다. 이것이 공포가 등장한 계기였다.
한옥은 석기 시대 막지, 움집 같은 수혈 식 구조에서 시작됐으며 역사 시대까지도 마한은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이뤄졌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의 고상 가옥, 만주 같은 북부에서는 구들이 사용된 원초적 한옥 구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삼국 시대의 가옥은 여러 토기나 벽화 등 당시 가옥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 평민이 살던 곳은 단칸집이긴 하지만 여러 기둥을 세워 지은 비교적 넓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가옥이라 부를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게 됐다. 고구려같이 추운 북부는 상술한 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과 문을 좁게 튼 반면 남쪽에서는 더욱 개방적인 형태를 띠었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서 기와와 단청이 전래하여 왕궁 같은 상류층의 가옥들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기와로 된 화려한 가옥 형태에서 주거 생활을 누렸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귀족 문화의 융성과 함께 매우 사치스러운 주택을 짓고 살았다. 신라 말에는 황동 등 금속 부착물로 집을 장식하기도 했고[2] 심지어 금입택이라 하여 황금으로 집을 덮어버리는 예도 있었다. [3] 고려 시대에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극에 달해서 고려청자로 청과(청자 지붕)를 올리는 것이 유행했으며 이는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경복궁 복원 사업을 위해 궁터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다량의 청과가 발견되어 실록의 내용대로 경복궁의 건물 다수가 청과 건물이었음을 입증하였다. (궁궐 중에 현대에 남아있는 청과 건물은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다)
특히 이 시대에는 입식 생활을 하여 타일을 깔기도 했고, 단청을 칠하거나 복층 구조, 누각에 기단을 쌓고 난간을 설치하는 등 조선 시대와는 매우 다른 형태의 한옥 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물론 이 시기 하층민은 땅을 파고 지은 수혈 식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조선 시대에는 사치를 자제하는 유교 문화의 전래와 함께 더욱 검소한 주택 형태를 추구하게 되었지만 사용한다든지, 복층 구조를 지닌 집 등 마냥 수수했을 거라는 조선 시대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기록들도 상당수 있다. 지방에서는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옥 고택들처럼 공간을 널찍하게 사용한 건물군으로 이뤄진 주택, 초가집 등이 있었으며 한양 같은 도시에는 북촌 한옥들처럼 단일 건물이 ㅁ자나 ㄹ자로 꺾이고 꺾여서 공간 활용도를 높인 구조가 구한말 사진에서 확인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경성 사진을 보면 이런 도시형 한옥들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방 후 한국 전쟁 동안 서울 및 전국이 파괴되고, 또 새마을 운동과 같은 한국인의 주거 형태에 대한 큰 변화를 거치며 재래식 가옥들이 신식 가옥들로 대체되면서 한옥은 과거의 주거 형태로 남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 가옥 형태. 한반도의 환경과 한국인의 재래식 의식주 생활 방식에 맞춰 발전한 여러 특징을 가지며 흔히 사진 속 목조 구조의 기와집을 떠올리지만, 볏짚과 황토로 지은 초가집도 한옥의 범위에 속한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양옥에 밀려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계속 잇고 있다.
한옥이라는 말 자체는 구한말 문호 개방과 해방 후 현대화를 거쳐 '양옥(洋屋)'이 급격히 보급되면서 이에 대비되는 의미로 재래식 가옥들을 '한옥'이라 일컬으면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설이 있는데, 이를 상세히 설명하면 외국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 사는 주택을 지칭한다. 한반도라는 지형의 특성상 사계절이 분명하여 겨울을 대비한 구들과 여름을 대비한 마루의 결합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고 있다. 별칭으로 '조선옥(朝鮮屋)'[1]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한옥 자체가 곧 주거 형태였으므로 오늘날 그냥 집을 집이라고 하듯이 주가(住家), 제택(第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형태에 따라 아파트, 주택이라고 나누듯 그냥 기와집, 초가집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전면의 기둥들과 후면의 기둥들을 각각 일자로 연결하는 창발과 제곱, 전면과 후면의 기둥을 앞뒤로 연결하는 보, 그리고 서까래와 그를 받치는 도리가 핵심 자재이다. 초가 한옥이나 기와 한옥이나 지붕의 자재만 다를 뿐 목조 구조물이라는 근본은 같다. 기와를 쓰는 한옥은 나무를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대패를 쓴다. 볏짚을 이어 붙이는 초가 한옥은 도끼나 자귀로 듬성듬성 깎아 만드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다. 큰 나무는 가격이 비싸기에 잘 깎아 기와 한옥에 쓰고, 초가 한옥은 가격이 싼 휘어 있고 작은 나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모두 목조 구조물임이 같나 나무의 가격과 그에 따른 마름질(나무를 쓰임에 따라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게 다듬는 일)의 수고에 따라 외관이 크게 차이나 보일 뿐, 구들과 마루의 결합이라는 한옥 그 자체의 특징에는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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